헤세의 소개

 


[4살때의 헤세]

 

1877년 독일 뷔르템베르그 주의 칼브에서 태어난 헤세는 매우 비범하여 3살이 지나자 벌써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조숙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4살도 채 못되어 오늘날의 유치원과 같은 어린이 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때 벌써 선생님과 충돌이 있었다. 헤세는 감독이니 권위니 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있는 성품을 갖지 못했다. 헤세가 학교를 싫어하게 된 것은 그의 고집스런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엄격하고 획일적인 교육의 탓도 컸다. 아무튼 학교라는 틀은 그의 성격에는 걸맞지 않았다.
<수레바퀴의 밑에서>의 고통은 진작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칼브(Calw)와 헤세의 생가]

 

"저와 어린 헤르만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아이를 기를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는 이제 지력이 부칠 뿐이에요. 이 애는 하나의 생명을, 거인의 힘을, 굳센 의지를, 4살이란 나이로서는 너무나 놀라고 있답니다."
이해와 사랑이 충만했던 어머니에게까지도 헤세는 힘에 겨운 아이였다. 헤르만은 어린시절부터 신학교 탈주사건, 자살 미수사건등을 저질러 18살에 서점 견습 점원이 될때까지 그의 어머니 어깨위에 드리워진 십자가였다.

[헤세의 어머니 마리 헤세(19세 때)

 


[헤세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


"시인 아니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


[12세 때의 헤세]

 


[헤세의 가족(1889년)]
헤세, 아버지 요하네스, 동생 마눌라, 어머니 마리, 누나 아델레, 동생 한스(왼쪽부터)

한 시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당사자에게나 어머니에게 있어서도 이따금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내부에는 이상 야릇한 그 무엇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창조적인 광기, 이를테면 디어먼(악마)이었고, 문학으로서 하나의 출구를 찾기까지 헤르만의 내부를 마구 휘젓고 있었다. 마음 한 곳의 울적한 응어리를 처리할 방법을 찾지 못한 헤세가 자신과 어머니를 괴롭히고, 나아가서 선생님에게까지 충돌을 일으킨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헤르만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희망 소년 헤르만이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럴 생각이었다.

1891년(14세) 7월 중순 헤세는 마울브론신학교에 합격했다. 헤세는 예상 외로 빨리 신학교와 기숙사 생활에 순응하여 즐거운 생활을 하게된다. 그리이스어와 라틴어 공부도 즐거웠고, 선생님들에게도 호감이 갔다. 헤르만은 자작시를 낭독하여 동급생들에게 들려 주기도 하였다. 다만 엄하기만한 규율과 주입식 교육이 자유스런 기질의 헤르만에게는 견디기 힘들었다. 헤브라이어의 알파벳 쓰는 법을 익히고, 내부 강성(발음방법의 일종)의 기호가 뭔지를 알게 될 무렵, 헤세는 느닷없이 내면적인 폭풍에 휩쓸려 수도원 학교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는'감금'이란 중벌을 받게 되어고, 급기야는 신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마울브론(Maulbronn)수도원]

마울브론 신학교의 바우어 교장은 엄하면서도 유머가 있는 참다운 교육자였다. 바우어 교장을 존경하게 된 헤세는 의욕적으로 공부에 힘썼다. [헤세가 존경했던 바우어 신학교 교장]


1892년(15세) 11월 헤세는 칸시타트 김나지움(인문 중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고전 과목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얻었으나 수학과 물리학과 같은 과목은 따라갈 수 가 없어 교사들의 눈총을 받곤 했다. 학업에 흥미를 잃은 그는 밤 늦게까지 놀아나기가 일쑤였고, 그 결과 빚을 지기도 했다. 이때 하이네와 투르게네프를 탐독하며, 시작을 유일한 구원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11개월만에 여기서도 퇴학을 당했다.[칸스타트 김나지움의 7학급당시의 헤세(뒷줄 중앙이 헤세)]


15세 무렵 헤세의 행동은 한마디로 말해서 탈선과 폭력, 절망과 방황
그것이었다.
[헤세가 1895~1898년 사이에 일했던 튀벵겐의 Heckenhauer서점]

학교를 그만둔 헤세는 1895년 10월, 18세 대 대학촌 튀벵겐의 헤겐하우어 서점에서 일자를 얻었다. 남들처럼 마울브론 신학교를 졸업만 했더라면 튀벵겐의 신학부에 들어가 국비로 공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헤세는 그 속 학생들에게 책을 파는 하찮은 견습 점원의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매일 10시간에서 12시간, 진종일 서서 책을 팔고 짐을 꾸리고 발송을 하는 하면 고서를 정리해야 했다.


헤세는 서점의 고된 일과를 잘 견디어 내었고, 폐점 후에는 문학을 공부하고 특히 괴테를 애써 읽었다.

서점에 근무하던 후반기에는 상당히 많은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작은문학회'라는 조직의학생 단체들과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튀벵겐의 '작은문학회' 회원들
파버, 루프, 핑크, 하멜렐레, 헤세(왼쪽부터)]

 

1899년(21세)으로 접어들자 헤세는 의젓한 한 사람의 점원으로 성장했고, 책을 파는 신세에서 책을 쓰는 신분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21세때의 헤세(1899)]

 

1899년 헤세는 처녀시집<낭만의 노래>를 출판했다. 이때 그의 나이 21세, 절망과 어둠에서 허덕이던 그의 처지로서는 시인에의 출발이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판매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6백부(이것도 거의 자비 출판에 가까웠다) 중, 한 해의 판매부수가 고작 54권이었다. [헤세의 첫 번째 저작인 '낭만의 노래']

 

헤세의 출세작 <페터 카멘친트>는 1903년 가을<신전망>에 그 일부가 게재되었다가 이듬해 1월에 간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으로 헤세는 27세의 나이에 일약 인기 작가로 등장했다.
[헤세의 출세작 '피터 카멘친트']

문필로 삶을 꾸려 나갈 목표가 선 헤세는 마리아 베르눌리와 1904년 8월 결혼했다. 바젤에서 여동생과 사진관을 경영하는 규수였던 그녀는 유명한 수학자 가정 출신으로 헤세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다. 쌍방 집안에서 이 걸맞지 않는 결혼에 반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헤세는 어머니 마리의 모습을 닮은 그녀의 용모에서 어머니 품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일종의 모성에 이끌린 것이다. [헤세의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베르눌리]


톨스토이와 러스킨에게 공명하여 전원생활을 보내고 싶었던 헤세 부부는 가까운 독일려의 한촌인 가이엔호펜의 어는 농가로 이주하였다.

가이엔호펜 호반에서의 초대의 수확은 <수레바퀴 아래서>였다.
헤세는 이 작품으로 신직작가로서의 굳건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헤세의 두 번째 가이엔호펜의 서재(1919)]



[가이엔호펜에 있던 집의 테라스에서 책을 읽고 있는 헤세]

 

[Castigione로 향하는 헤세와 Dthmar Schoeck (1911)]

 

[인도여행중에(중앙이 헤세,오른쪽은 Hans Sturzenegger)]

헤세는 안락의 쾌감을 맛보는 한편 안락에 저항을 느끼게 되었다. 구속은 헤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헤세는 도처에서 초대를 받고 자작시를 낭독하면서 여행도 즐겼다. 방랑자로서의 그의 본바탕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부풀어오르는 여정을 억제할 길 없었던 그는 1911년 9월, 화가 슈츔첸에가와 함께 아시아 여행을 떠났다. 이 먼 여행의 동기와 목적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유럽의 권태, 이를테면 유럽 문화에 대한 권태감과 안주에의 혐오에서 강행된 것이리라. 그는 귀국후 <인도에서>라는 작푸을 출간했다. 책이 출간되자 마자 날개 돋힌 듯이 팔려 순식간에 6판을 찍었다.

현실은 비정하고 냉혹했다. 헤세는 예술가로서 부부 생활의 파탄을 맞고 있었다. 예술가끼리의 부부생활이란 원래가 어렵게 마련이지만, 헤세부인 신경 과민에 우울증마저 겹친 아홉 살 연상의 흠 많은 아낙이었다.




[가이엔호펜에서의 헤세와 마리아(1905)]


"사랑은 미움보다 크고 이해는 노염보다 높으며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헤세는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개전과 함께 베를린 영사관에 출두하여 병역을 지원했으나 신체 조건상 군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말았다. 처음 그느 이 전쟁이 독일로서는 불가피한 전쟁이라고 보고 심적으로 독일 편에 섰으나, 8월에 들어서면서 독일군이 벨기에로 침략해 들어가자 독일정부에 대해 비판적 자세로 돌아섰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9)]

 

 

 


[군포로구호기관]


독일 학자와 작가들이 편협한 애국주의를 내세워 적국 타도를 선동하는 언동에 광분하는 자태를 보이자 헤세는 1914년 11월 3일 <새 쮜리히 신문>에 <친국여, 제발 그쳐다오!>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러자 독일 신문계는 헤세를 조국의 배반자, 얼치기라고 매도하고 비난과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헤세가 공동작업한 억류신문의 제75호(1918)]


독일 포로 위문 사업에 너무나 헌신한 결과 헤세는 과로하여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셋째 아들 마틴이 뇌막염을 앓아 수년간 그 간호도 겸해야 했고, 1916년에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내 마리아의 정신 질환은 악화되어 1918년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헤세 자신도 노이로제에 걸려 1916년부터 자주 루페른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헤세의 자화상(1919)]


정신요법은 정신분석에 대한 그의 눈을 뜨게하여 창작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무의식의 세계에대한 의미, 악마이기도 한 신 아프락사스의 인식, 이것들은 1919년에 간행된 <데미안> 속에 채택된다.


헤세의 대표작인 <데미안>은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익명으로 발표되었다. 무면의 신인 싱클레어는 베를린 시의 '폰타네 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헤세가 실제 작자임이 밝혀지자 상은 회수되고 <데미안>은 헤세 작으로서 정식 간행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독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시민이요, 조국을 배반한 작가로 낙인찍히게 된다. 나치스들의 집요한 박해와 추적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결국 그는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1923년에 영원한 스위스 국민이 된다. [데미안의 표지(1919)]


"그림 그리는 일은 나의 마술도구이며 파우스트의 외투이다. 그림의 도움으로 나는 벌써 수 천번이나 마술을 부렸고 어처구니 없는 현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40이 되던 해부터 헤세는 갑자기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화가 헤세].


헤세가 주로 그린 것은 루가노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스위스의 평온한 시골풍경과 몬테뇰라 근교의 자연풍경이었다. 헤세의 그림에는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나 동물이 없다. 그가 그런 대상을 그릴줄 모른다기보다는 인간에 지치고 인간세계에 염증을 느낀 그가 인간을 화면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변함 없이 묵묵히 다정히 서있는 나무며, 떠가는 구름이며, 파랗게 빛나는 호수를 그렸다. [루가노 호수]

 

"내가 화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현상세계에 푹 빠져서 완전히 내자신을 잊는 것은 귀중한 체험입니다."

[보드머에 있는 헤세의 아틀리에와 서재(1950)]

20세기 초 독일 표현주의가 독일 미술계를 풍미할 무렵 헤세는 당신의 시대상황과는 달리 동화나 유토피아적 꿈과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었다. 헤세는 그림을 통해 현실을 잊었으며 현실을 극복하였다.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노년의 헤세]


50세 무렵 헤세는 이전의 생활에서 탈피할 전환점을 찾게 되었다. 헤세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자신과 주위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그 가장 큰 동기는 니논 역사와의 결합이었다. 헤세로서는 세 번째인 이 결합으로 비로소 성실하고 행복된 부부생활을 이룰 수 있었다.[몬테뇰라 마을]

[몬테뇰라의 새집에 입주할 때의 헤세(1931)]
1931년 한스 보드머가 황금의 언덕에 집을 지어 헤세로 하여금 평생도록 살게 하였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스위스, 독일 양국에서 다투어 헤세의 책이 간행되어 꽃 피는 봄이 헤세에게 찾아들었다. 괴에테 상, 노벨 문학상에 이어 빌헬름 라베 상(1950), 독일 최고의 문화 훈장 '푸르 러 메리트' 등이 헤세에게 수여되었다

[노년에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헤세] (왼쪽)
[손녀 엔켈 데이비드와 함께(19580)] (중앙)
[한낮의 휴식(Louis Moiliet과 함께) 1957] (오른쪽)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쟁에 광분하고 있을 대, 헤세는 몬테뇰라에서 <유리알 유희>라는 거작을 쓰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피비린내나는 폭력에 의해 인도와 정신 문화가 짓밟히고 있는데, 헤세는 순수한 정신의 이상향을 구축해 가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노년의 헤세]


"오래도록 무거운 짐을 진 자, 그 짐을 부리도록 허락이 내린다. 그것은 감미롭고 근사한 일이다." -유리알 유희'에서

                                

[헤세의 데드마스크(1962)]              [헤세의 마지막 작품인 "꺾인 가지"(1962)의 수정본]

그는 숨진 바로 전날까지 소품 시 <꺾인 가지>의 시상에 머리를 짜고 있었다.

        

삶에 대한 집착도 없지는 않았지만 헤세는 시인으로 일관한 한평생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