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죽어도 좋다 - 가수 이은미

 

 꼭 작년 이맘 때였다. 지금처럼 ‘가뭄정국’에 간절한 단비가 추적추적 연세대 노천극장에 뿌려지고 있었다. 가수 이은미를 라이브로 만난 첫자리였다. 여자가 노래를 하니 여자가 즐거워라, 여인여락(女人女樂) 콘서트. 그녀의 코끝에서 손을 휘젖던 광분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객석 뒷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던 나를 무대 앞으로 빨아들인 거다.

단독 콘서트도 아닌 ‘잠깐’ 출현의 무대에서 저토록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진심은 반드시 공유된다 했다. 노래에 자신을 모조리 담아버리는 가수를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이은미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은 그랬다. 무대 위에서 죽겠다!

그로부터 한 해가 흘렀다. 6월 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노래인생 15년, 다섯 번째 앨범발표 즈음한 큰 무대가 그녀에게 마련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관객과 눈 맞출 수 있는 4백 석 규모의 소극장이 좋다지만 더이상 그녀는 소극장용이 아니다. 1, 2, 3층, 3천7백 석 규모의 대극장에 서기에 무대도, 객석도 모자람이 없었다.

“갈까요? 자, 그럼 갑시다!”

이은미는 시작을 그렇게 지른다. 비트 강한 멜로디의 록은 그렇다 하더라도 재즈나 솔풍의 잔잔한 곡도 폭우의 격정으로 어디 저 멀리까지 가려 한다. 어떤 노래고 그녀는 ‘그저 그렇게’ 부르는 법이 없다. 노래방 18번도 심수봉의 것이라는데 「그때 그 사람」이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아니라 「비나리」다. 싸한 슬픔도 저항하듯 온몸을 내어 부르는 게 이은미다. 그녀에게로 간 노래는 그렇게 죄다 온몸이 성대가 되어 울린다. 그런 이은미가 무대에 섰는데 제아무리 엉덩이가 무겁다는 30, 40대 관객도 자리를 박차지 않을 수 있을까.

이은미의 팬은 조직적이지 않다. ‘맨발’이란 팬클럽도 재작년에야 결성됐다. ‘현장’에서 하나둘 귀하게 얻은 사람들이 늦둥이 팬클럽을 낳았다. 적당히 돈 귀한 줄 알고 사회의 쓴 맛도 본 20, 30대를 팬으로 둔 탓에 공연 때 ‘조폭’적인 열광도 없다. 자기 좋은 만큼 아우성이지 집단적으로 앞자리 꿰차고 앉아 일반관객을 주눅 들게 하지 않는다. 지난달 연세대에서 있었던 ‘통일 그날의 노래’ 공연장에서도 한 사람이 그렇게 이은미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오늘 백기완 선생님의 통일음악회에서 이은미씨 공연을 처음 봤어요. 전에는 단순히 개성있는 가수로만 알았었는데 공연을 통해서 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그 무엇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손과 발이 짜릿짜릿해지고 몸이 붕붕 뜨는 것 같았답니다. 만약에 혼이 있다면 내 몸에서 벗어나 그렇게 날아다닐 거예요. 서너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얼얼해져요.”

그런 다음 “다음에 꼭 콘서트에 갈게요”란 말을 잊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인간 이은미가 아닌 가수 이은미

 

 ‘가수’ 이은미의 얼굴은 밉다. 특히 노래가 절정에 이를 무렵 표정은 포효하는 짐승 같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이고 땀 범벅이 되어 화장기도 다 날아간 모습은 사진기자를 난감하게 한다. 이쁘거나 혹은 우아하거나, 모름지기 여자가수다운 ‘그림’이 안 잡힌다. 연습할 때 거울도 안 보나?

“형편없지요 뭐. 포기했어요(웃음). 그래도 노래가 먼저니까. 신경 안 쓰기로 했어요.”

‘인간’ 이은미의 얼굴은 반대다. 이쁘다. 웃기도 잘하고 지긋한 표정이 편안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얼굴은 보여 주고 싶지 않단다. 술자리로 이어진 인터뷰에서 카메라를 철수한 까닭은 그랬다.

“인간 이은미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가수니까, 또 그 덕분에 이렇게 인터뷰하는 거니까 대중에겐 무대 위의 이은미로만 보이고 싶어요.”

무대 위에서 다 보여 줘 미련없다는 투다. 죽을 힘을 다하는데 그럼…. 작년 연말 부산공연에서 관객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저러다 저 여자 작두 타는 거 아냐?’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무대에선 신기가 흘렀다. 당시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맛’이 갔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나고 공연 말미, 2001년 1월 1일을 알리는 타종소리가 울리고 터진 그녀의 목소리는 자기 것이 아니었다. 본래 소리보다 더 좋은 소리가 나왔다. 그녀의 팬이라면 공연장에서 그렇게 ‘맛이 간’ 이은미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3년 전엔 아예 기절을 해버렸다. 낮 공연을 끝내고 정신을 잃어 저녁 공연이 시작되고 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런데도 자리를 뜬 관객은 다섯 명뿐. 관객은 돌아가지 않았고 그녀의 공연은 계속되었다. 그때 이후로 그녀의 “무대 위에서 죽어도 좋다”는 각오는 더욱 맹렬해졌다.

 

 

 

‘현장’ 중심형 가수

 

 맨발의 디바! 늘상 이은미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맨발’과 ‘디바’는 어울릴 수 없는 단어인데 오페라의 여주인공에게나 붙여지는 그런 품격 있는 이름에 웬 맨발? 무대의 권위를 무너뜨린 그녀가 맨발이 된 사연은 이렇다.

“1993년 7월 마당 세실극장에서 공연할 때였어요. 그 여름에 에어컨도 안 나오는 극장에서 11일 동안 하루 2회씩, 총 22회 공연을 해야 했는데 5일째 되던 날 목소리가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도 했지요. 그러다가 무대에 다시 올라가기 위해 잠시 거울 앞에 앉았는데 눈물이 나왔어요. 서러웠나 봐요. 너무 힘들어서. 울음소리도 안 나왔으니까.”

그때 깨달았다. 지금 이 모습이 진짜 나인가. 욕심이 너무 과했다. 대관료 무서워 강행군했지만 무리였다. 정말 중요한 것만 보여 주자. 노래. 그래서 목걸이며 팔찌며 주렁주렁 매달았던 액세서리를 다 빼버리고 화장도 지웠다. 복장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 무대 위에서 가장 폼나고 싶어 걸친 부속들을 모두 벗어던지니 홀가분했다. 아직 하나가 남았다. 10센티미터 굽의 하이힐. 이것도 벗자. 그리고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날아갈 것 같았다. 목소리? 여전히 안 나오는 채로 했다. 대신 그녀는 자유를 얻었다.

“올누드로 한다는 느낌이더라구요. 하지만 편안했어요. 맘껏 지르고 뛰었지요.”

그때부터 줄곧 어느 무대고 맨발이다. 단 한 곡을 부르는 자리도 예외 없다. 그래서 발바닥이 성할 날이 없다. 지난 6월 4일 모처럼만에 방송 출현했다가 상처만 얻었다. SBS의 ‘기아체험 24시’에 나가서 무대 바닥에 박힌 핀에 찔려 발바닥엔 며칠째 밴드를 붙이고 다닌다. 하지만 더 큰 상처는 마음에 입었다. 약도 없는 상처.

 

 

 

 

하이힐 벗고 맨발의 자유 얻다.

 

1년에 단독 콘서트만 60여 차례. 그 외 크고 작은 공연까지 합치면 그녀가 뛰는 라이브는 100회에 달한다. 그 중 방송출현은 열 번이 채 안 된다. 두 달에 한 번꼴. 이번에도 역시나 방송에 나갔다가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맙시다”하고 사장한테 싫은 내색을 했다.

“사고가 있었어요. 음향에 문제가 생겨서 소리 한 부분이 안 나왔거든요. 아직도 방송국 상황이 그래요. 다 입만 벙긋벙긋하는 가수들 판이고, 뭘 좀 하려는 가수들을 위해선 준비된 게 없어요. 그들을 위해선 화려한 조명만 있으면 되니까. 근데 우리는 음향부터 모든 장비들이 다 동원되어야 하거든요.”

이번 신보앨범 중 긱스의 이적이 준 「꿈의 죽음」을 부를 때 사고가 났다. ‘노래의 죽음’이 되었다.

“기대는 안 했어요. 안 좋을 거라는 확신 하에 갔으니까. 그래도 자꾸 상처를 받아요. 배 이상의 인원으로 배 이상의 장비를 갖추고 공을 들여도 그게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 대한민국은 참 이상한 나라예요. 가수가 노력하면 도와주고 배려해야 하는데 반대로 돼버렸어요. 이게 뭔가 싶은 거죠. 정말 이런 거 안 하고 싶어요.”

그나마 그녀가 ‘치는’ 방송프로는 「이소라의 프로포즈」와 「수요예술무대」 정도. 가수마다 제각각인 음색을 다 맞춰 주긴 힘들어도 최소한 이들 프로그램은 차후 믹싱이라도 하는 성의를 보인다. 제일 낫다지만 그래도 라이브에 비하면 50점. 어떨 땐 아예 엔지니어를 데려다 쓰기도 했다. 그런 실망스러운 방송에 왜 다시 도전했을까.

“대중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 싶진 않아요. 불특정 다수가 두렵긴 해도 밴드가 직접 나와 연주하고 라이브로 노래하는 걸 대중이 접할 기회만 된다면 몸 아끼지 않고 뛰겠다는 거죠. 10대들도 처음엔 생소한 듯하다가 나중엔 표정이 달라져요. 이런 무대를 경험해 본 적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 기회를 어른들이 뺏어 간 거예요.”

이제 방송에서 라이브는 ‘문화적 충격’이라 할 만큼 생경한 일이 되었다. 그녀는 종종 자문한다. 가수의 생명은 소리 아닌가? 근데 음향 리허설이 아니라 다들 카메라 리허설만 하고 내려간다. 그보다 가관인 건 다른 데 있다. 가수가 무대를 감독하는 게 아니라 매니저가 한다. 매니저가 무대 위로 올라와 이것저것 카메라워크까지 지시한다. 가수는 그 지시를 받는다. 율동과 표정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이런 일 다반사예요. 이쪽을 크게 잡아라 저쪽을 어떻게 해라. 노래의 이 부분이 피크니까 이때는 이 가수를 집중 조명하고…. 이건 좀 오버다 싶었죠. 왜 매니저가 무대를 지시합니까? 방송이 이런 매니저들을 상대하다 보니 정작 가수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 몰라요. 매니저와 방송국의 거래만 있는 거죠. ‘아이구, 선생님 무대에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구하시는 게 뭡니까, 아 그렇게 지시하죠.’ 웃기지 마라 병신들…, 속으로 그랬어요.”

 

 

니들이 뮤지션이냐

 

 이은미가 던진 직격탄으로 가요계는 한동안 뜨거웠다. 이른바 이은미 필화사건. 모 남성잡지에 ‘당신도 가수인가’라는 글을 쓰고 생긴 파문이었다. 뮤직비디오가 더 많이 소개되는 가수, 음반 성격을 의상코디로 설명하는 가수, 언더에서 오버로 가더니 노래보단 애드립이 능해진 가수, 오락프로에 나와 망가지거나 연예인 누구누구와 친한지가 더 중요해진 가수, 영웅인 양하지만 실은 마케터인 가수. 그들이 김범수, SES, 김장훈, 이현우, 서태지를 겨냥했다는 건 이미 알 사람은 다 안다. 하지만 특정 몇몇이 문제랴. 가수 대접 안 하는 방송, 가수 대접받기를 포기한 가수. 그 오랜 악순환의 고리가 언제쯤 풀릴까 싶지만 회의적이다.

“후회는 없어요. 일부러 나서려고 한 말이 아니라 기회가 와서 솔직하게 제 생각을 말한 것뿐입니다. 이젠 제 말에 책임을 져야죠.”

3년 전인가, 한번은 가요순위프로그램에 나갔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온 적이 있다. 혼자 그랬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걸 후배들까지 선동해 문제가 좀 컸었다.

“전주, 간주, 후주 막 자르더라구요. 짧은 시간에 많은 가수를 소개해야 되니까 그랬겠죠. 노래 여기저기를 난도질하는데 이건 내 노래가 아니다 싶었어요. 그래서 못하겠다 했지요. 대기실에 있는 후배들한테까지 가서 ‘니들이 진짜 뮤지션이라면 왜 가만히 있냐’ 그랬죠.”

그래도 방송엔 지장 없다. 이은미 혼자 허튼짓한 거다. 그렇담 진짜 뮤지션이란 뭘까 궁금해 물었다. 노래하는 사람이지. 그럼 노래란? 소리로 전달되는 예술. 그렇게 답한다. 하지만 가수의 정의는 달라지지 않나. 지금이 FM라디오 시절도 아니고 모름지기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하는 영상시대 아닌가.

“엔터테이너, 연예인이라고 밝히면 아무 문제가 안 되요. 근데 정작 그들이 되고 싶은 건 연예인이고 가수는 그냥 가져다 쓰는 거예요. 연예인 되기 위해 가수를 선택하는 거죠. 그러니 가수가 탤런트 대접받고 코미디언 취급받는 거 아닙니까.”

노래가 빠져도(못해도 혹은 안 해도) 되는 가수시대. 하지만 정작 가수 이은미가 성이 난 건 노래‘하는’ 가수들에 대한 배려다. 그건 그것대로 있어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녀가 강조하고 싶은 건 다양성이지, 모두가 라이브 가수가 되자는 건 아니다.

그녀의 진단을 더 들어보자. 우리 대중가요계가 너무 빨리 커버렸다. 노래가 너무 ‘시장’적으로 대형화하면서 다들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가수를 본다. 음반 하나를 만드는 데 요즘엔 1억 원 이상이 든다. 뮤직비디오도 제작해야 하니 액수가 더 커진다. 그때부터 가수는 발목이 잡히는 거다. 매일 신보가 두세 장씩 발매되지만 10만 장 이상 팔리는 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 대다수의 수익을 올리지 못한 가수는 다음 앨범을 제작해 주지도 않는 기획사에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노비문서’라는 말이 딱 맞다. 그렇다고 잘 팔린 가수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인세계약은 그야말로 꿈같은 소리. HOT 앨범이 장당 20원에 계약되었다는 설도 있다. 결국 이은미가 내놓은 해법은 앵무새처럼 기획사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선 가수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자유 찾고 저항 불러

 

 “지금의 밴드 구성하는 데 4년 반 걸렸어요. 마이크 깨고 드럼 채 날리면서 제작자와 싸운 시간이에요. 제작자들은 가수를 그저 딴따라라고 생각하고 존중하려 하지 않아요. 결국 가수가 권리를 찾는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대중에게 전달되기까지 전 과정을 프로듀싱하고자 애쓴다. 그래서 이젠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스탭들이 먼저 스탭회의 언제냐고 묻는다. 가수 이은미의 무대이니만큼 총감독은 당연히 이은미 자신이다. 오랜 싸움 끝에 얻은 시스템이다.

한 며칠 무대만 쫓다가 그녀가 좋아한다는 삼겹살에 소주 먹는 얼큰한 자리가 되었기에 마음에 남겨둔 질문을 던졌다.

 

- 가창력도 있지만 ‘작가’로서 창작도 중요할 텐데.

“안목과 배치도, 직접 작곡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역량이라고 생각해요. 매번 곡을 선택하고 편곡한 뒤 나답게 부르기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이번 앨범도 그래서 많이 늦어졌구요.”

붉어진 김에 좀더 이어가 보자.


-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유독 즐겨 부르는 것 같다.

“저는 그들의 노래를 통해 제 노래인생에 배움을 얻었어요. 그걸 무대에서 솔직하게 드러낸 거구요. 그렇게 불러왔던 곡들을 묶은 게 『노스탤지어』 앨범입니다.”

김현식, 신중현, 김광석, 전인권, 양희은, 해바라기…. 심지어 어렸을 적 엄마가 설거지하는 곁에서 귀동냥하던 이봉조의 ‘보고 싶은 얼굴’까지 이은미의 음악선생 역을 했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그녀에겐 배움이었다. 그리워할 것을 맘껏 그리워하자. 자유로운 영혼이 화가 난 까닭은 그것이었다. 그뿐이다. 강추! 이은미 버전 「찔레꽃」을 한번 들어보길, 라이브면 더 좋구.

 

 

약력 및 주요 앨범 소개

1967년 서울생
1988년 다운타운 음악활동 시작
1989년 신촌블루스 3집 앨범 참여
1992년 1집 "기억 속으로" 발표
(드라마 '모래 위의 욕망' 주제곡)
1993년 팝송 앨범 "리뷰 80" 발표
1994년 2집 "어떤 그리움" 발표
1995년 라이브 앨범 "쿨 앤 핫" 발표
1996년 "팝스 월드" 발표
1997년 신중현 헌정 앨범 참여 "봄비"
1997년 3집 "자유인" 발표
1999년 4집 "비욘드 페이스" "노스탤지어" 발표
2000년 김현식 추모앨범 참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2001년 5집 "노블리스" 발표

 

2001-7-24 글 박형숙, 사진 박여선  - '디지탈말'에서,.